에드먼드 바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드먼드 바턴은 호주 연방 결성을 주도하고 초대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1849년 시드니에서 태어나 시드니 대학교에서 고전을 전공했으며, 변호사로 활동하며 뉴사우스웨일스 의회 의장과 법무 장관을 지냈다. 연방 결성 운동을 이끌며 헌법 협약에 참여했고, 1901년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백호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여성 참정권을 도입했다. 1903년에는 호주 고등 법원의 초대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헌법 해석에 기여했으며, 1920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스트레일리아의 외무장관 - 허버트 에바트
허버트 에바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법률가, 정치인, 외교관으로, 고등법원 판사, 검찰총장, 외무 장관, 유엔 총회 의장을 역임하며 국제 연합 창설에 기여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주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외무장관 - 빌 헤이든
빌 헤이든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으로 노동당 대표, 재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총독을 역임했으며, 연방 의회 의원, 사회 서비스부 장관, 밥 호크 정부의 외무부 장관을 지내며 호주와 아시아 관계 증진에 기여했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 벤 치플리
벤 치플리는 1885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나 총리를 역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경제를 관리하고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며, 은행 국유화 시도는 실패했으나 연방은행 설립 등 통화 정책 통제권을 강화하고 1951년 사망했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 앤서니 앨버니지
앤서니 앨버니지는 1963년생 오스트레일리아 정치인으로 2022년부터 총리를 역임하고 있으며 노동당 대표로서 총선 승리를 이끌어 원주민 권리 헌법 명시, AUKUS 안보 협정, 기후변화 대응 등 다양한 국내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 시드니 대학교 동문 - 타우파하우 투포우 4세
타우파하우 투포우 4세는 살로테 투포우 3세의 아들로 태어나 통가의 총리를 지냈고, 1965년부터 2006년까지 통가의 국왕으로 재임하며 1970년 통가의 완전한 독립을 이끌어냈다. - 시드니 대학교 동문 - 앤서니 앨버니지
앤서니 앨버니지는 1963년생 오스트레일리아 정치인으로 2022년부터 총리를 역임하고 있으며 노동당 대표로서 총선 승리를 이끌어 원주민 권리 헌법 명시, AUKUS 안보 협정, 기후변화 대응 등 다양한 국내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에드먼드 바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각하 |
이름 | 에드먼드 바턴 |
원어 이름 | Edmund Barton |
![]() | |
출생일 | 1849년 1월 18일 |
출생지 | 글레베,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대영 제국(현재 뉴사우스웨일스주, 오스트레일리아) |
사망일 | 1920년 1월 7일 (70세) |
사망지 | 하이드로 매제스틱 호텔, 메들로 배스, 뉴사우스웨일스 주, 오스트레일리아 |
안장지 | 웨벌리 공동묘지 |
배우자 | 제인 로스(1877년 결혼) |
자녀 | 6명 |
![]() | |
공직 | |
직위 | 초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
임기 시작 | 1901년 1월 1일 |
임기 종료 | 1903년 9월 24일 |
군주 |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
총독 | 호프턴 경 테니슨 경 |
전임 | 직위 신설 |
후임 | 앨프레드 디킨 |
직위 |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 재판관 |
임명자 | 테니슨 경 |
지명자 | 앨프레드 디킨 |
임기 시작 | 1903년 10월 5일 |
임기 종료 | 1920년 1월 7일 |
전임 | 직위 신설 |
후임 | 헤이든 스타크 |
직위 | 2대 보호무역당 대표 |
부대표 | 앨프레드 디킨 |
임기 시작 | 1889년 |
임기 종료 | 1903년 9월 24일 |
전임 | 조지 딥스 |
후임 | 앨프레드 디킨 |
직위 | 외무장관 |
총리 | 본인 |
임기 시작 | 1901년 1월 1일 |
임기 종료 | 1903년 9월 24일 |
후임 | 앨프레드 디킨 |
직위 | 뉴사우스웨일스 주 야당 대표 |
주총리 | 조지 리드 |
임기 시작 | 1898년 10월 5일 |
임기 종료 | 1899년 8월 23일 |
전임 | 윌리엄 린 |
후임 | 윌리엄 린 |
직위 | 뉴사우스웨일스 주 법무장관 |
주총리 | 조지 딥스 |
임기 시작 | 1891년 10월 23일 |
임기 종료 | 1893년 12월 14일 |
전임 | 조지 보웬 심슨 |
후임 | 찰스 헤이든 |
주총리 | 조지 딥스 |
임기 시작 | 1889년 1월 17일 |
임기 종료 | 1889년 3월 7일 |
전임 | 조지 보웬 심슨 |
후임 | 조지 보웬 심슨 |
직위 | 뉴사우스웨일스 입법의회 의장 |
임기 시작 | 1883년 1월 3일 |
임기 종료 | 1887년 1월 31일 |
전임 | 조지 위그럼 앨런 경 |
후임 | 제임스 헨리 영 |
의회 | |
선거구 | 헌터 선거구의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901년 3월 30일 |
임기 종료 | 1903년 9월 30일 |
전임 | 선거구 신설 |
후임 | 프랭크 리델 |
선거구 | 헤이스팅스 및 맥클레이의 뉴사우스웨일스 입법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898년 11월 23일 |
임기 종료 | 1900년 3월 1일 |
전임 | 프랜시스 클라크 |
후임 | 프랜시스 클라크 |
선거구 | 동부 시드니의 뉴사우스웨일스 입법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891년 7월 11일 |
임기 종료 | 1894년 8월 3일 |
전임 | 월터 브래들리 |
후임 | 선거구 폐지 |
선거구 | 동부 시드니 |
임기 시작 | 1882년 12월 28일 |
임기 종료 | 1887년 3월 2일 |
전임 | 아서 렌윅 |
후임 | 윌리엄 맥밀런 |
선거구 | 웰링턴의 뉴사우스웨일스 입법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880년 12월 14일 |
임기 종료 | 1882년 12월 28일 |
전임 | 존 셰퍼드 |
후임 | 데이비드 퍼거슨 |
선거구 | 시드니 대학교의 뉴사우스웨일스 입법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879년 8월 26일 |
임기 종료 | 1880년 12월 14일 |
전임 | 윌리엄 윈데이어 |
후임 | 선거구 폐지 |
직위 | 뉴사우스웨일스 입법 council 의원 |
임기 시작 | 1897년 5월 12일 |
임기 종료 | 1898년 7월 18일 |
임기 시작 | 1887년 3월 8일 |
임기 종료 | 1891년 6월 12일 |
정당 | |
소속 정당 | 보호무역당(1887년 이후) |
학력 | |
출신 학교 | 포트 스트리트 고등학교 시드니 그래머 스쿨 |
모교 | 시드니 대학교 |
직업 | |
직업 | 변호사 정치인 |
2. 어린 시절
에드먼드 바턴은 1849년 1월 18일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 글리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윌리엄 바턴과 메리 루이자(결혼 전 성씨: 와이다)는 모두 잉글랜드 런던 출신으로 1827년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 도착했다. 바턴은 12명의 자녀 중 열한 번째였으며, 형제자매로는 7명의 누이와 4명의 형제가 있었다. 이 중에는 작가 조지 버넷 바턴도 포함된다. 형제 중 세 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남동생 시드니는 1852년에 태어났지만 9개월 만에 사망했고, 누나 엘렌은 1860년 화재로 사망했으며, 맏형 윌리엄 주니어는 1863년에 사망했다.) 그의 이름 '에드먼드'는 가족 내에서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당시 사망한 탐험가 에드먼드 케네디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1901년 1월 1일,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출범하면서 에드먼드 바턴은 초대 총리로 임명되었다.[45][14] 비록 총독 호프턴 경의 초기 오판으로 윌리엄 린에게 먼저 총리직 제안이 가는 '호프턴의 실수'가 있었으나, 결국 연방 운동을 주도했던 바턴이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36][39]
바턴의 아버지는 회계사, 바자 상인, 주식 중개인, 부동산 중개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나 사업적으로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고 파산을 겪기도 했다. 바턴은 어린 시절을 글리브에서 보냈고, 1851년에는 가족과 함께 시내 더 록스의 컴벌랜드 스트리트로 이사했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이었지만 아버지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에는 어머니가 여학교를 운영하며 가계를 도왔다. 문해력이 높았던 그의 부모, 특히 어머니는 바턴의 학업 성취에 많은 지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바턴은 포트 스트리트 공립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시작했으며, 이후 시드니 그래머 스쿨에 다녔다. 그는 1857년 학교 개교 당시 첫 입학생 중 한 명이었을 수 있다. 시드니 그래머 스쿨 재학 시절, 그는 훗날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에서 함께 일하게 될 리처드 오코너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바턴은 1863년과 1864년에 학교 수석 졸업생(dux)이자 학교 대표(school captain)를 지냈다.
16세이던 1865년, 바턴은 시드니 대학교에 입학하여 대학교 평의회로부터 특별상을 받았다. 다만 수학 실력이 부족하여 입학 장학금 세 개 중 하나를 받지는 못했다.[1] 대학에서는 고전을 전공하면서도 영어 문학, 수학, 물리학, 프랑스어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해졌으며, 나중에도 두 언어 모두 구사했다.1879년 뉴사우스웨일스 의회 연설에서 바턴은 호메로스의 구절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인용했다.[2] 1902년 총리 재임 시절, 그는 로마에서 교황 레오 13세를 만나 라틴어로 대화를 나눴다. 1867년 새로 부임한 찰스 배덤 교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학 2학년과 3학년 때 장학금을 받았고, 1868년에는 문학사(BA) 학위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대학교 메달에 준하는 상과 20파운드의 상금을 받았다. 이후 1870년 시험을 통해 문학 석사(MA)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 바턴은 시드니 대학교 크리켓 클럽의 회원이자 시드니 조정 클럽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3] 1870년 뉴캐슬로 크리켓 경기를 위해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제인 메이슨 로스를 만났고, 두 사람은 1877년에 결혼했다.[4][5][36]
3. 뉴사우스웨일스 정치
1876년, 바턴은 시드니 대학교 졸업생들이 투표하는 뉴사우스웨일스 입법부 선거에 출마했으나, 윌리엄 찰스 윈디에르에게 43표 대 49표로 패배했다.[8][38] 1877년에도 같은 선거구에서 낙선했지만, 윈디에르가 사임한 후 1879년 8월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계에 입문했다.[8][36] 1880년 해당 선거구가 폐지되자, 그는 웰링턴 선거구(1880년 11월 ~ 1882년)와 이스트 시드니 선거구(1882년 11월 ~ 1887년 1월)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바턴은 자유 무역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언급하는 것이 "거의 불필요하다"고 여겼다.[5][36]
1882년, 바턴은 33세의 나이로 뉴사우스웨일스 입법부 의장으로 선출되어 당시 호주 입법부 역사상 최연소 의장이 되었다. 1884년에는 시드니 대학교 연합 회장(또는 학장)으로 선출되었다.[36][39] 1887년, 그는 헨리 파크스 경의 추천으로 뉴사우스웨일스 입법 의회(상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9][39]
1889년 1월, 바턴은 이전에 자유 무역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딥스가 이끄는 보호주의 정부에서 뉴사우스웨일스 법무 장관직을 수락했다. 이는 딥스가 다가오는 의회 회기에서 호주 연방 결의안을 지지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부는 같은 해 3월에 헨리 파크스가 다시 집권하면서 단명했다.[10][40]
이후 딥스가 다시 보호주의 정부를 구성하자, 바턴은 변호사로서 사적인 업무를 수행할 권리를 보장받고 다시 법무장관직에 복귀했다. 이는 딥스가 연방 결의안 지지를 다시 약속한 데 따른 것이었다.[5] 법무장관 재임 중 그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 직무 대행을 맡아 1892년 브로큰힐 광부 파업과 복잡한 선거 개혁 법안 처리를 담당하느라 연방 결의안 초안 작성이 지연되기도 했다. 그는 1892년 11월 22일 하원에 연방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위원회에서 심의되지 못했다.[5]
그는 1892년 12월 코로와, 앨버리 등지에서 회의를 열며 연방에 대한 지지를 넓히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1893년 10월, 그의 연방 결의안은 마침내 위원회에서 논의되었으나 하원 본회의에는 상정되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바턴은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프라우드풋 v. 철도 위원회' 사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로 한 합의 문제로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해당 소송에서 사임했지만, 장관이 정부 상대 소송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결국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5]
1894년 7월, 이스트 시드니 선거구가 폐지되면서 바턴은 랜드윅 선거구에서 재선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5] 재정적 어려움 때문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1895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연방 운동에 계속 헌신하여, 1893년 1월부터 1897년 2월까지 애쉬필드를 포함한 뉴사우스웨일스 전역에서 약 300번의 회의를 열고 연설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 시기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대륙을 위한 국가를 갖게 되었고, 국가는 대륙을 위해 존재한다"고 선언했으며, 1897년 3월에는 "호주 전체에서 연방 운동의 인정받는 지도자"로 평가받게 되었다.[5]
4. 연방 결성 운동
바턴은 헨리 파크스의 텐터필드 연설 이후 연방주의의 초기 지지자가 되었으며, 이는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부상했다.[5][36] 그는 1891년 3월 전국 오스트랄라시아 회의의 대표로 참여했다.[5] 이 회의에서 그는 연방 호주에서 "무역과 상거래...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원칙을 지지함을 분명히 했다.[5][36] 또한 하원뿐 아니라 상원도 대표성을 가져야 하며, 추밀원 사법 위원회로의 상고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그는 1900년에 제정된 호주 헌법과 실질적으로 유사한 헌법 초안 작성에도 참여했다.[5][36]
보호주의자들은 연방주의에 미온적이었고, 1891년 6월 바턴은 뉴사우스웨일스 입법 의회 의원직을 사임하고 이스트 시드니 선거에 출마하며 "보호주의가 연방주의의 적들로 구성된 내각을 의미하는 한, 그들에게서 표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5][36] 그는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파크스에게 투표했지만 그의 소수 정부에서 직책을 맡는 것은 거부했다.[5][36]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이 지지를 철회하여 1891년 10월 파크스 정부가 무너지자, 파크스는 바턴에게 뉴사우스웨일스에서 연방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5][36]
조지 딥스가 보호주의 정부를 구성하자, 바턴은 변호사 업무에 유리한 법무 장관직을 수락했다. 이는 딥스가 다가오는 회의에서 연방 결의안을 지지한다는 조건이었다.[36] 그러나 연방 결의안 초안 작업은 1892년 브로큰 힐 광부 파업과 복잡한 선거 개혁 법안 처리 문제로 지연되었다.[36] 1892년 11월 22일, 바턴은 하원에 연방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위원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했다.[36] 그동안 그는 1892년 12월 콜로와와 올버리 등지에서 대중 연설을 하며 연방 지지 캠페인을 시작했다.[36] 1893년 10월 마침내 위원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의회에서 논의 안건으로 상정되지는 못했다.[36] 12월, 바턴은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개인 변호사 자격으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법무 장관직을 사임했다.[36]
1894년 7월 선거에서 낙선하고[36] 1895년 선거에는 불출마했지만,[36] 바턴은 1893년부터 1897년까지 뉴사우스웨일스 전역에서 약 300회에 달하는 집회를 열고 연설하며 연방 결성 운동을 계속했다.[41] 애쉬필드 연설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대륙을 위한 국민과 국민을 위한 대륙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41] 1897년경 그는 "호주 전체에서 인정받는 연방 운동의 지도자"로 여겨졌다.[36]
1897년, 바턴은 제안된 연방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헌법 협약의 뉴사우스웨일스 대표 선거에서 최고 득표를 기록했다.[5][36] 사무엘 그리피스 경이 헌법 초안의 많은 부분을 작성했지만, 협약에서 이를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인 정치적 역할을 한 것은 바턴이었다.[5][9][36][39]
1897년 5월, 바턴은 조지 리드 총리의 추천으로 다시 입법 평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어 연방 법안 처리를 담당했다. 이는 리드의 법무 장관 잭 원트가 법안에 반대할 수 있도록 여지를 준 조치였다.[5][36] 1897년 9월, 협약은 시드니에서 다시 열려 식민지들이 제안한 286개 수정안을 검토했다.[5][36] 1898년 3월 헌법 초안이 최종 확정되었고, 바턴은 뉴사우스웨일스로 돌아가 6월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얻기 위한 캠페인을 이끌었다.[5][36] 투표 결과 과반수 찬성을 얻었지만, 이는 통과에 필요한 최소 8만 표에 미치지 못하는 71,595표였다.[5][36]
1898년 7월, 바턴은 총선에서 리드에게 도전하기 위해 상원 의원직을 사임했으나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5][36] 그러나 9월 헤이스팅스 앤 매클레이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의회에 복귀했고, 즉시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 보호주의자들이 섞인 야당 대표로 선출되었다.[5][36] 1899년 1월, 리드가 다른 주들로부터 상당한 양보를 얻어내자, 바턴은 리드와 함께 1899년 6월의 두 번째 국민투표를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여 주 전역을 돌며 지지를 호소했다.[5][10][36][40] 이 투표는 찬성 107,420표 대 반대 82,741표로 통과되었다.[5][10][36][40]
1899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의 지지 철회로 리드 정부가 실각할 상황이 되자, 노동당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안 바턴은 야당 대표직에서 사임했고 윌리엄 라인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5][12][36] 그는 1900년 2월 의원직을 사임하고 앨프레드 디킨, 찰스 킹스턴과 함께 런던으로 가서 영국 정부에 연방 법안을 설명했다.[5][12][13][36] 영국 정부는 헌법 초안에 포함된 추밀원 상소 폐지 조항에 강하게 반대했다.[5][36] 결국 바턴은 헌법 관련 문제('상호간' 문제)는 호주 고등 법원에서 최종 결정하되,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추밀원에 상소할 수 있도록 하는 타협안에 동의했다.[5][36]
5. 총리직 (1901-1903)
바턴은 보호주의당을 이끌고 1901년 3월 치러진 첫 연방 선거에 참여했다. 선거 결과, 보호주의당은 호주 노동당 (ALP)의 지지를 확보하여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17] 바턴 자신은 헌터 선거구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었다.[17]
총리로서 바턴 정부는 여러 중요한 법안을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1901년 이민 제한법을 제정하여 악명 높은 백호주의 정책을 법제화했다. 이는 노동당의 요구 사항이기도 했지만, 바턴 자신도 선거 운동 과정에서 이를 공약한 바 있다.[5][36] 한편, 1902년에는 연방 선거에서 여성 참정권을 도입하는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19][42]
1902년, 바턴은 에드워드 7세 국왕의 대관식 참석을 위해 영국을 방문했다.[5] 이 방문 기간 동안 열린 1902년 식민지 회의에서는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호주가 자금을 지원하는 새로운 해군 협정을 영국과 논의했다.[5][36]
바턴은 온건 보수주의 성향으로, 사교적이고 느긋한 성품 때문에 당내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언론으로부터 "토비 토스팟(Toby Tosspot, 술고래)"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20][44]
1903년 9월, 바턴은 새로 설립된 오스트레일리아 고등 법원의 창립 판사 중 한 명으로 임명되면서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알프레드 디킨이 총리직을 계승했다.
5. 1. 임명
새 총독 존 호프 경은 1900년 12월 15일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식민지 사무국으로부터 첫 연방 선거가 치러지기 전에 임시 정부를 구성할 인물을 선택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방 운동을 이끌었던 바턴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 총리로 임명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바턴 자신도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19일, 예상과 달리 호프 경은 뉴사우스웨일스의 총리였던 윌리엄 린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린은 연방 창설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의 주요 정치인들은 그의 내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호프 경의 이러한 결정은 '호프턴의 실수'로 불리며 큰 논란을 낳았고 실수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결국 12월 24일, 린은 호프 경에게 정부 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바턴을 추천했다. 이러한 혼선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 내각 구성은 연방 출범식 이틀 전인 12월 30일에야 공식적으로 발표될 수 있었다.
1901년 1월 1일, 새로운 연방 헌법이 발효됨과 동시에 바턴은 총리로 공식 임명되었다.[45][14] 이날 시드니에서는 도메인에서 시작하여 센테니얼 파크의 연방 파빌리온까지 이어지는 성대한 행렬이 있었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센테니얼 파크에 마련된 연방 파빌리온에서 새 정부 출범식이 거행되었다.[45][14] 행사에서는 초대 총독 존 호프 경이 세 번의 선서를 하고 빅토리아 여왕의 메시지를 낭독하는 것이 주요 순서였다. 바턴과 그의 내각 각료들은 충성 맹세를 했으며, 연방 행정 위원회에 대한 공식적인 선서는 그날 오후 늦게 이루어졌다. 이날의 행사는 'Inauguration of the Commonwealth|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출범영어'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촬영되어 배포되었는데,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평가받는다.[46][15]
5. 2. 내각 구성
바턴은 총리가 되기 일주일 전인 1900년 12월 말에 정부 구성을 요청받았다. 새로 부임한 호주 총독 존 호프 경은 첫 연방 선거 전에 임시 정부를 구성할 인물을 선택해야 했다.[36][39] 많은 이들이 바턴이 초대 총리가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호프 경은 12월 19일 뜻밖에도 뉴사우스웨일스의 총리였던 윌리엄 린에게 정부 구성을 의뢰했다. 이는 '호프토운 경의 실수'로 알려지게 되는데, 연방 결성에 반대했던 린에게 다른 식민지의 주요 정치인들이 협력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36][39] 결국 린은 12월 24일 정부 구성에 실패했음을 알리고 호프 경에게 바턴을 추천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 초대 내각의 구성은 연방 출범 이틀 전인 12월 30일에야 공식 발표될 수 있었다.
바턴이 구성한 바턴 내각은 현직 식민지 총리 4명(윌리엄 린 포함), 전직 총리 2명 등 당시 주요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왕들의 내각", "지휘자들의 오케스트라", "장군들의 군대" 등으로 불렸다.[16] 바턴의 핵심 동맹인 앨프레드 디킨은 내각 서열 2위였고, 리처드 에드워드 오코너는 초대 상원 정부 대표를 맡았다. 선거 전 내각에는 단 한 차례의 변화가 있었는데, 1901년 1월 10일 제임스 딕슨이 사망하면서 필립 피시로 교체되었다.[36]
바턴 자신은 총리직과 함께 외무부 장관직을 겸임했다. 당시에는 총리실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1911년 신설), 바턴은 외무부를 통해 공식 업무를 수행했다.
5. 3. 국내 정책
바턴은 1901년 1월 17일, 자신의 선거구인 웨스트 메이틀랜드 타운 홀에서 열린 연설을 통해 첫 연방 선거를 위한 정책 구상을 밝혔다. 그의 주요 계획에는 연방 수도, 고등 법원, 주간 위원회 설립이 포함되었으며, "적당한 보호 관세"를 통해 노령 연금과 통일된 우편 시스템 도입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연방 선거에서의 보편적 선거권 도입, 트랜스 오스트레일리아 철도 건설 추진, 산업 분쟁에 대한 연방 정부의 개입을 허용하는 법률 제정, 그리고 아시아 및 태평양 제도 출신 이민자들의 이민 금지를 약속했다.
1901년 4월, 바턴 정부는 호주의 새로운 국기 디자인을 위한 공모전을 후원한다고 발표했다. 이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디자인은 현재 호주 국기의 기초가 되었으나, 정작 바턴 자신은 뉴사우스웨일스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기존의 호주 연방 기를 더 선호했다. 새 국기 디자인은 주로 선박에 사용될 예정이었기에 영국 해군성의 승인이 필요했고, 1903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18]
바턴 정부가 초기에 추진한 주요 법안 중 하나는 1901년 이민 제한법이었다. 이 법은 악명 높은 백호주의 정책을 법적으로 명문화한 것으로, 노동당은 정부 지원의 조건으로 아시아계 이민 제한을 요구했지만, 바턴 역시 선거 운동 과정에서 백호주의 정책 도입을 공약한 바 있다. 그는 "인간 평등의 원칙은 영국인과 중국인의 평등에 적용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한편, 1902년 연방 선거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도입한 것은 주목할 만한 개혁으로 평가받는다.[19]
바턴은 온건 보수주의자로 분류되며, 그의 느긋한 정치 활동 방식은 당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풍채가 좋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긴 저녁 식사와 좋은 와인을 즐기는 모습 때문에 더 불레틴으로부터 "토비 토스팟(Toby Tosspot, 술고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0]
5. 4. 대외 관계
1902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바턴은 영국에 머물렀다. 주된 목적은 에드워드 7세 국왕의 대관식 참석이었으나, 대관식이 6월에서 8월로 연기되면서 귀국이 늦어졌다. 이 방문에는 존 포레스트 경(국방부 장관)이 동행했다.
이 방문 기간 동안 열린 1902년 식민지 회의는 중요한 외교 무대였다. 바턴은 이 회의에서 기존에 호주 식민지들이 외국 해군 위협으로부터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자금을 지원하던 협정을 연방과 영국 간의 새로운 해군 협정으로 대체하고자 했다.[5] 하지만 이 협정은 이후 디킨과 같은 인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디킨은 1908년 협정을 중단하고 호주 자체 해군을 대폭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21]
영국에서 귀국하는 길에 바턴과 포레스트는 캐나다를 방문하여 토론토, 오타와(총독의 손님으로 방문) 등을 거쳐 태평양 연안까지 둘러보았다.[22][23]
6. 고등법원 판사 (1903-1920)
1903년 9월 24일, 바턴은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의 창립 멤버가 되기 위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추측은 1903년 사법법 통과 이후 몇 달간 계속되었다. 그의 정계 은퇴 결정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당내 일부에서는 그가 정부를 이끌 에너지와 헌신이 부족하다고 보았고, 바턴 자신도 건강 문제로 고생하며 의사로부터 활동적인 정치를 그만두라는 권고를 받았다. 또한, 과거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종신직인 판사직이 가져다줄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내각 구성원 다수가 각자의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턴에게 판사직 수락을 권유하는 분위기였다. 헌법 초안 작성에 기여한 공로와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고려할 때, 그의 임명은 큰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
1903년 10월 7일, 바턴은 그의 오랜 동료인 새뮤얼 그리피스, 리처드 에드워드 오코너와 함께 초대 대법관으로 선서했다. 그리피스는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헌법 초안을 함께 만들었던 세 사람은 법원 초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판결에서 거의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초기에는 심리 건수가 적어 반대 의견이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바턴의 후임 총리가 된 앨프리드 디킨의 정부는 1903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부진했고, 이후 크리스 왓슨, 조지 리드로 총리가 바뀌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이어졌다. 1904년 말, 리드 정부의 법무 장관 조시아 사이먼은 판사들의 출장 경비와 각 주 수도에서의 사건 심리에 반대하며 법원과 갈등을 빚었다. 이 갈등으로 정부와 법원의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바턴은 사임까지 고려했으나, 1905년 6월 디킨이 다시 총리가 되면서 상황이 해결되었다.
1906년, 디킨 정부는 H. B. 히긴스와 아이작 아이작스를 추가로 대법관에 임명했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성향이었던 이들의 합류는 보수적인 성향의 기존 판사들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며 법원에 새로운 긴장감을 가져왔다. 바턴은 그리피스, 오코너와 함께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하나의 블록을 형성했다. 특히 바턴은 초기 8년간 그리피스와 거의 모든 판결에서 의견을 같이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게으름이나 리더십 부족으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판결 해석을 복잡하게 만드는 동의 판결을 피하려는 성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1913년, 바턴은 그리피스가 해외에 있는 동안 9개월간 수석 판사 대행을 맡았다. 같은 해 오코너의 사망과 두 자리 증원으로 세 명의 새로운 대법관(프랭크 개번 더피, 찰스 파워스, 조지 리치)이 임명되면서 법원 구성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들은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헌법 해석에 있어 바턴과 그리피스는 점차 소수 의견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바턴은 이전보다 더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며 그리피스와 의견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늘어났다. 법정에서 바턴은 성실하고 공정한 판사로 존경받았으며, 정계 시절의 온건 보수적 태도를 유지했다.[36]
6. 1. 주요 판결
오스트레일리아 대법원 판사로서 바턴은 여러 중요한 판결에 참여했다. 그는 새뮤얼 그리피스 대법원장, 리처드 에드워드 오코너 판사와 함께 초기 대법원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헌법 해석에 있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며 주의 권한을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 ''D'Emden v Pedder'' (1904):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미국의 정부 간 면제 개념을 참고하여, 연방과 주 정부 기관이 서로의 활동에 간섭할 수 없다는 '대리인의 묵시적 면제' 원칙을 호주 법체계에 도입했다. 이는 연방과 주 간의 권력 관계를 정립하는 중요한 판례가 되었다.
- ''Deakin v Webb'' (1904): 대법원은 ''D'Emden v Pedder'' 판결의 원칙을 적용하여 연방 공무원에게 주 정부가 소득세를 부과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1906년 영국 추밀원 사법 위원회의 ''Webb v Outtrim'' 판결로 뒤집혔다. 바턴은 호주 대법원이 최종 상소 법원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추밀원의 개입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 ''Blundell v Vardon'' (1907): 분쟁 재판소 재판장으로서 바턴은 조셉 바든의 상원 의원 선거가 선거 부정 행위로 인해 무효라고 단독으로 판결했다.
- ''R v Barger'' (1908): 바턴은 그리피스, 오코너와 함께 다수 의견에 참여하여, 연방 의회가 제정한 특정 산업 규제 법안(Excise Tariff Act 1906)이 사실상 노동 조건을 규제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연방의 과세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연방 정부의 사회 개혁 입법 능력을 제한하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비슷한 시기에 이들 세 판사는 연방 화해 및 중재 법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일련의 판결에도 참여했다.
- ''뉴사우스웨일스 대 연방'' (1915):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주간 위원회(Inter-State Commission)가 사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바턴은 위원회에 사법적 권한 부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소수 의견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판결은 헌법 초안 작성자 중 한 명이었던 바턴의 헌법 해석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 ''Farey v Burvett'' (1915): 제1차 세계 대전 중, 바턴은 연방 정부가 국가 방위를 위해 헌법상의 방위 권한을 광범위하게 행사할 수 있다는 다수 의견에 동참했다.
- ''Duncan v Queensland'' (1916): 바턴은 아이작 아이작스 판사와 함께 헌법 제92조(주 간의 자유로운 교역 보장) 해석에 관한 다수 의견에 반대했다. 다수 의견은 주 정부가 특정 상품의 주 경계 이동을 금지하는 것이 92조 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했으나, 바턴은 이러한 해석이 자유 무역 원칙에 어긋난다며 "깊은 슬픔"을 표했다. 이 판결은 바턴 사후인 1920년 ''엔지니어 사건''에서 뒤집혔다.[36]
전반적으로 바턴은 법정에서 성실하고 공정한 판사로 존경받았으며, 정계 시절의 온건 보수 성향을 유지했다. 그는 그리피스, 오코너와 함께 주의 자치권을 옹호하며 연방 정부의 권한 확대를 경계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는 1906년 이후 진보적인 성향의 아이작 아이작스와 헨리 번스 히긴스 판사가 임명되면서 점차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36]
7. 사망
1920년 1월 7일 뉴사우스웨일스주 메들로배스에 있는 하이드로 매제스틱 호텔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5] 그는 시드니 교외 보클루즈에 있는 사우스 헤드 일반 묘지(웨이벌리 묘지 참조)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두었다.[5]
바턴의 형제 해리엇을 통한 조카로는 빅토리아 연방 하원의원 아서 로빈슨과 사업가 라이오넬, 윌리엄 시드니 로빈슨이 있다.[27]
8. 가족
에드먼드 바턴은 1849년 1월 18일 시드니 글리브에서 메리 루이사 와이다와 윌리엄 바턴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자녀 중 열한 번째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잉글랜드 런던 출신이었으나, 1827년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 이주했다. 바턴에게는 작가 조지 버넷 바턴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누이와 네 명의 형제가 있었으나, 형제 중 세 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바턴은 제인 바턴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5]
이름 | 생몰년 | 주요 정보 |
---|---|---|
에드먼드 알프레드 | 1879년 5월 29일 ~ 1949년 11월 13일 | 뉴사우스웨일스 주 판사 |
윌프리드 알렉산더 | 1880년 ~ 1953년 | 최초의 뉴사우스웨일스 로즈 장학생 (1904년) |
진 앨리스 | 1882년 ~ 1957년 | 1909년 데이비드 모언 경(1873~1955)과 결혼 |
아놀드 허버트 | 1884년 1월 3일 ~ 1948년 | 1907년 제인 헝거포드와 결혼, 이후 캐나다로 이민 |
오스왈드 | 1888년 1월 8일 ~ 1956년 2월 6일 | 의사 |
레일라 스테파니 | 1892년 ~ 1976년 | 1915년 런던에서 의사 로버트 스콧 스커빙의 아들 로버트 크리스토퍼 처칠 스콧 스커빙과 결혼[26] |
또한 누이 해리엇을 통해 빅토리아 연방 하원의원 아서 로빈슨과 사업가 라이오넬 로빈슨, 윌리엄 시드니 로빈슨 등의 조카를 두었다.[27]
바턴은 1920년 1월 7일 뉴사우스웨일스주 메들로 배스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남겼다.[5] 그는 시드니 교외 보클루즈에 있는 사우스 헤드 일반 묘지(웨이벌리 묘지 참조)에 안장되었다.
9. 업적 및 평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의 초대 총리로서 에드먼드 바턴은 국가의 초기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1년 1월 17일, 그는 웨스트 메이틀랜드 타운 홀 연설에서 연방 정부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연방 수도, 고등 법원, 주간 위원회 설립 계획과 함께, 노령 연금 및 통일된 우편 시스템 재원 마련을 위한 "적당한 보호 관세" 도입이 포함되었다. 또한 연방 선거에서의 보편적 선거권 도입, 트랜스 오스트레일리아 철도 건설 추진, 산업 분쟁에 대한 연방 정부의 개입 허용, 그리고 아시아 및 태평양 제도 출신 이민자들의 이민 금지를 공약했다.
바턴 정부의 초기 입법 활동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은 1901년 이민 제한법 제정이었다. 이 법은 소위 백호주의 정책을 공식화한 것으로, 노동당의 지지를 얻기 위한 조건이기도 했지만 바턴 스스로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이를 약속한 바 있다. 그는 "인간 평등의 원칙은 영국인과 중국인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발언하며 인종 차별적인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19] 반면, 1902년 연방 선거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회 개혁으로 평가받는다.[19]
1901년 4월, 바턴 정부는 새로운 호주 국기 디자인을 위한 공모전을 후원했다. 공모전에서 당선된 디자인이 현재 국기의 바탕이 되었으나, 정작 바턴 자신은 기존의 호주 연방 기를 더 선호했다고 알려져 있다. 새로운 국기 디자인은 주로 선박에 사용될 예정이었기에 영국 해군성의 승인이 필요했고, 1903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18]
개인적으로 바턴은 온건 보수주의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여유로운 정치 스타일은 당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사교적이고 미식가적인 면모를 지녀, 당시 언론 매체인 ''더 불레틴''으로부터 "토비 토스팟(Toby Tosspot)"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20]
9. 1. 기념
1951년과 1969년, 오스트레일리아 우체국에서 그의 초상이 담긴 우표를 발행하여 바턴을 기념했다.[33][34]호주 캔버라 인근의 바턴 고속도로는 바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바턴 선거구와 여러 정부 부처 및 국립 기관, 주요 정당 본부가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특별구의 교외 지역인 바턴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35] 이 교외 지역에는 그의 이름을 딴 정부 청사 건물인 에드먼드 바턴 빌딩이 있다. 또한 디킨 대학교의 바턴 칼리지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참조
[1]
서적
Their Fiery Cross of Union. A Retelling of the Creation of the Australian Federation, 1889-1914
Connor Court
[2]
간행물
Edmund Barton
http://classic.austl[...]
New South Wales Bar Association
2019-01-01
[3]
웹사이트
History of the Sydney Rowing Club
https://web.archive.[...]
Sydneyrowingclub.com.au
2012-09-24
[4]
웹사이트
Fast facts: Edmund Barton
http://primeminister[...]
2014-10-31
[5]
문서
Barton, Sir Edmund (Toby) (1849–1920)
2020-06-10
[6]
서적
Their Fiery Cross of Union. A Retelling of the Creation of the Australian Federation, 1889-1914
Connor Court
[7]
뉴스
For our PMs, there's just no avoiding the follow-on
http://www.smh.com.a[...]
2007-12-28
[8]
서적
The Electoral Atlas of New South Wales
New South Wales Department of Lands
[9]
웹사이트
Edmund Barton, before
http://primeminister[...]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2010-02-08
[10]
웹사이트
Sir Edmund Barton GCMG (1849–1920)
2019-04-16
[11]
웹사이트
Barton, Sir Edmund (1849–1920)
http://gutenberg.net[...]
Project Gutenberg Australia
2010-02-08
[12]
서적
Their Fiery Cross of Union. A Retelling of the Creation of the Australian Federation, 1889-1914
Connor Court
[13]
서적
On Message: Political Communications of Australian Prime Ministers 1901 – 2014
Clareville Press
[14]
서적
Alfred Deakin: A Biography
Melbourne University Press
[15]
뉴스
Inauguration of the Commonwealth (1901)
https://aso.gov.au/t[...]
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
2019-01-13
[16]
서적
The Manner of Their Going: Prime Ministerial Exits from Lyne to Abbott
Australian Scholarly Publishing
[17]
뉴스
Elections
http://primeminister[...]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2019-12-30
[18]
간행물
National Parliament, National Symbols: From British to Australian Identity
https://www.aph.gov.[...]
Australian Parliamentary Library
2019-01-25
[19]
웹사이트
Edmund Barton, In office
http://primeminister[...]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2010-02-08
[20]
웹사이트
Edmund Barton, fast facts
http://primeminister[...]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2010-02-08
[21]
문서
Deakin, Alfred (1856–1919)
2007-09-16
[22]
뉴스
Latest intelligence – Sir Edmund Barton in Canada
1902-09-05
[23]
뉴스
Latest intelligence – Sir Edmund Barton in Canada
1902-09-11
[24]
간행물
Griffith, Barton and the early governor-generals: aspects of Australia's constitutional development
[25]
간행물
Griffith, Barton and the early governor-generals
[26]
뉴스
Australians Abroad.
https://nla.gov.au/n[...]
1916-01-15
[27]
문서
Robinson, Sir Arthur (1872–1945)
2023-09-15
[28]
뉴스
The Coronation Honours
1902-06-26
[29]
뉴스
London Gazette
1902-06-26
[30]
뉴스
Court Circular
1902-08-09
[31]
뉴스
University intelligence
1902-06-25
[32]
뉴스
The Colonial Premiers in Edinburgh
1902-07-28
[33]
웹사이트
Stamp
http://www.australia[...]
Australian Stamp and Coin Company
2010-02-08
[34]
웹사이트
Stamp
http://www.australia[...]
Australian Stamp and Coin Company
2010-02-08
[35]
뉴스
Sir Edmund Barton
https://www.masons.o[...]
Freemasons NSW & ACT
2019-12-31
[36]
웹사이트
Barton, Sir Edmund (1849 - 1920)
http://www.adb.onlin[...]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2007-03-12
[37]
뉴스
For our PMs, there's just no avoiding the follow-on - National - smh.com.au
http://www.smh.com.a[...]
[38]
서적
The Electoral Atlas of New South Wales
New South Wales Department of Lands
2007
[39]
웹사이트
Edmund Barton, before
http://primeminister[...]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2007-09-01
[40]
웹사이트
Sir Edmund Barton (1849 - 1920)
http://www.parliamen[...]
Parliament of New South Wales
2007-08-31
[41]
웹사이트
Barton, Sir Edmund (1849 - 1920)
http://gutenberg.net[...]
en:Project Gutenberg Australia
2007-05-31
[42]
웹사이트
Edmund Barton, In office
http://primeminister[...]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2007-09-02
[43]
간행물
Deakin, Alfred (1856 - 1919)
http://www.adb.onlin[...]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2007-09-16
[44]
웹사이트
Edmund Barton, fast facts
http://primeminister[...]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2007-08-31
[45]
서적
Alfred Deakin: A Biography
Melbourne University Press
[46]
뉴스
Inauguration of the Commonwealth (1901)
https://aso.gov.au/t[...]
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
2019-01-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